성매매 여성이 밝힌 ‘지옥에서 보낸 14년’
중학교때 가출해 서울로…배고픔 못이겨 성매매 첫발
1년 뒤 빚 갚고 집으로…할일 없어 다시 업소로
평범한 삶 쉽잖아 죽고 싶었으나 “이년아 빚 갚고 죽어”
한겨레21
» 인천 숭의동 성매매 집결지인 이른바 ‘옐로하우스’ 풍경. 7년 전 박은경(가명)씨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이곳에는 성매매 여성들이 매일 ‘손님’을 맞고 있다. 인천 인권희망센터 강강술래 제공
일부 여성은 왜 몸을 팔게 되는가. 날마다 몸을 내줘야 하는 여성들의 몸과 마음에는 무슨 일이 생길까.

여기, 전직 성매매 여성 한 명의 이야기를 통해 성매매를 둘러싼 유입 경로와 실태를 훑는다. 한 사람의 이야기로 우리 사회의 실태를 그려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서울대 여성연구소와 여성인권진흥원의 연구자료로 질문에 대한 답을 보탰다. _편집자

1991년 늦가을이었다. 강원도의 작은 도시에 살던 15살 여중생 은경이는 집을 나왔다. 친구와 함께였다. 아버지는 딸에게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의 폭력을 버티다 못한 엄마는 그해 봄, 은경이보다 먼저 집을 떠났다.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그는 그날 아침을 기억했다. 엄마는 은경의 손을 잡고 “나 없어도 오빠와 동생에게 잘해줘”라고 부탁했다. 어린 딸은 엄마를 잡지 않았다. 아빠한테 맨날 맞기만 한 엄마는 차라리 떠나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학교에 가서도 계속 엄마 생각만 했다. 서둘러 돌아온 집에, 역시 엄마는 없었다. 외로웠다. 속마음 터놓을 친구가 유일하게 기댈 곳이었다. 친구의 엄마는 성매매 여성이었다. 친구는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혼자 보냈다. 기댈 곳 없는 두 여중생은 도시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돌아올 차비도 없이 서울로 떠났다.

어린 중학생이 갇힌 ‘빨간 불빛의 집’

서울의 공기는 찼다. 두 여중생은 서울역 앞에서 이틀을 노숙했다. 배고팠다. 3일째, 키가 작은 ‘가죽점퍼’가 다가왔다. 밥을 사줬다. 일자리도 구해준다고 했다. 법원 근처 어디에 있는 식당이라고 했다. 함께 택시를 타고 1시간 넘게 이동했다. 대도시를 벗어난 외진 곳에 이르니 ‘빨간 불빛이 나오는 집들’이 있었다. 고향에서도 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나중에 그곳이 경기도 파주 법원리 성매매 집결지라는 것을 알았다. 낯선 곳에서 어린 중학생들은 잔뜩 위축됐다. 아이들은 작은 방으로 인도됐다. 잠시 기다리니 나이 든 여인이 따뜻한 밥상을 차려왔다. 가죽점퍼는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 애원했다. 식당인 줄 알고 왔으니 집에 보내달라고 했다. 답이 돌아왔다. “이년들아, 진작에 얘기했어야지. 몸값으로 얼마를 냈는데.” 그렇게 성매매가 시작됐다.

몸값은 한 명에 250만원씩이었다. 여기에 은경이가 묵는 방에 새로 들여놓은 침대와 가구, 텔레비전 가격도 빚이 됐다. 단숨에 빚은 750만원으로 불어났다. 할머니는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라 했다. 할아버지는 자연스럽게 ‘아빠’가 됐다. 아빠와 엄마에게는 함께 사는 ‘진짜’ 아들과 딸이 있었다. 딸은 보육교사였고, 아들은 서울에 직장이 있다고 했다. 이들은 마루와 복도를 공유했다. 딸과 아들은 가게 뒷문으로 출퇴근을 했다. 은경의 ‘일터’와 한 가정의 보금자리는 기괴하게 뒤섞였다.


첫 구매자를 지금도 기억한다. 왁자지껄한 일군의 남자들이 우르르 업소로 몰려왔다. 술로 만신창이가 된 한 명만 업소에 남았다. 남자들은 “우리 친구 군대 가니까 잘해달라”며 떠났다. 남자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은경은 방구석에 숨죽이며 옹크리고 앉았다. 밤이 무척 길었다.

나이가 어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엄마는 누가 물어보면 스무 살이라 말하라고 가르쳤지만, 누구도 그렇게 믿지 않았다. 남자들은 “더 어린 거 같은데?” “어려도 괜찮아” 따위의 말만 했다. 누구에게도 은경의 실제 나이가 문제되지 않았다. 이 업소에 있는 동안 은경은 단 한 번도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영업시간이 지나면 업소의 모든 문은 잠겼다. 모든 물품은 전화하면 배달이 됐다. 화장품이나 생리대, 음식 등 직접 나가서 살 일이 없었다. 아니, 사러 나가는 것이 금지됐다. 주변에는 하나의 상권이 맞춤형으로 짜여 있었다.

벌이는 좋았다. 한 달 수입이 800만원을 넘기도 했다. 하루에 10명 이상 구매자를 맞기도 했다. 수입은 5:5로 나눴다. 정작 은경에게 떨어지는 돈은 없었다. 방세와 세탁비, 식대, 가재도구 등 비용을 대고 나면 실제 남는 돈은 70만원 정도였다. 그 돈은 빚을 갚는 데 쓰였다. 결국 월급은 고스란히 엄마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1년이 지나서 빚을 간신히 갚았다. 엄마에게 집에 다녀오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번에는 엄마도 그를 잡을 명분이 없었다.

“이년아 빚은 갚고 죽어야지”

고향에 돌아와도 할 일은 없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무관심했다. 친구 어머니의 권유로 다방에서 배달일을 시작했다. 월급이 40만원이었다. 1년쯤 지나자 ‘티켓’을 팔라는 권유가 들어왔다. 16살 때부터였다. 가진 것 없는 미성년자에게도 성매매 유혹은 지뢰처럼 깔려 있었다. 이후 ‘일터’는 다방, 단란주점, 룸살롱 등으로 바뀌었다. 직업소개소의 ‘소개쟁이’가 업소들을 알선했다. 이들의 권유에 따라, 업종과 지역을 달리해서 떠돌았다. 23살이 되던 해에 몸이 이상을 보였다. 일로 먹는 술과 커피는 위를 갉아먹었다. 술을 안 마시고도 영업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그래서 흘러들어간 곳이 인천 숭의동 ‘옐로하우스’였다. 이른바 ‘유리방’(업소의 전면이 유리로 돼 있어 행인들이 성매매 여성을 ‘고를’ 수 있는 업소)들이 밀집한 성매매 집결지였다.

한번 들어간 업소는 떠나기 어려웠다. 빚이 가장 컸다. 도망가게 되면 이른바 ‘해결사’가 붙었다. 성매매 여성들은 일을 시작하며 업소에 신분증을 맡겼다. 신분증에 적힌 주소는 해결사들에게 ‘해결’의 실마리가 됐다. 이들이 알음알음으로 추적해오면 도망간 여성들이 다시 끌려 들어오기 일쑤였다. 해결사에게 붙잡혀온 여성에게는 자리를 비운 기간의 월급만큼 채무로 쌓였다. “섬에 팔아버리겠다”는 협박도 무서웠다. 성매매 업주의 구타도 두려웠다.

그래도 은경은 업주에게 맞아본 적은 없었다. 더 무서운 쪽은 성구매 남성들이었다. 강원도 횡성의 다방에서 일할 때였다. 티켓을 끊은 남성이 밤에 그를 다짜고짜 산으로 끌고 갔다. 영문은 알 수 없었다. 공포는 본능적으로 다가왔다. 남성에게 저항하자, 매질이 시작됐다. 간신히 그를 피해 도망쳤다. 야밤에 피투성이가 된 채로 길을 걷는 여성에게 아무도 차를 세워주지 않았다. 그렇게 4시간을 걸었다. 성매매 업소에 와서 마약을 하는 남성들도 있었다. 눈앞에서 남성의 표정이 형언할 수 없이 변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형사에게 ‘기분 나쁘게 쳐다본다’는 이유만으로 팔이 부러질 정도로 구타를 당한 동료도 있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변태적 행위를 강요하는 남성들도 있었다. 자신도 함께 미쳐가는 것 같았다. 업주도 딱히 성매매 여성의 편이 아니었다. 성구매 남성과의 분쟁은 종종 여성 탓으로 간단히 돌아왔다.

» 2008년 인천 숭의동 성매매 집결지에서 한 여성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한겨레> 류우종 기자
성매매를 그만둘 수는 없었을까? 말처럼 쉽지 않았다. 배운 것도 적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아내이자 엄마가 되고 싶었지만 꿈은 아무래도 멀어 보였다. ‘이렇게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빚의 굴레도 무서웠다. 일은 넘쳤지만 돈은 모이지 않았다. 23살 때 2800만원이던 빚은 인천 성매매 집결지에서 일한 5년 동안에도 계속 족쇄처럼 떠나지 않았다. 액수만 650만원으로 줄었을 뿐이다.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했다. 어느 날, 강원도의 한 여관방에서 혼자 술을 마시며 울다가 벽에 걸린 못에 줄을 이었다. 줄이 목에 닿는 순간, 이대로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덜컥 겁이 났다. 그렇게 죽음의 문턱에 잠시 올라섰다가 다시, 지옥으로 돌아왔다. 수면제를 한 움큼 먹은 적도 있었다. 그래도 다음날은 또 시작됐다. 나중에 얘기를 전해들은 업주는 “빚은 갚고 죽어야지”라고 타박했다.

2004년 업주가 건강 때문에 업소를 닫았다. 머물 곳이 없어지자, 은경은 아는 사람의 집에 잠시 몸을 의탁했다. 그게 계기가 됐다. 성매매 여성을 위한 상담소가 떠올랐다. 상담소 문앞까지 갔다. 그리고 세 번을 그냥 돌아섰다. ‘누구세요?’라고 물으면 도대체 뭐라고 답할지 용기가 나지 않았다. 네 번째로 상담소를 찾은 날, 간신히 문을 열었다. 상담자들은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그는, 말보다 눈물이 먼저 쏟아졌다. 처음 보는 이들 앞에서 그는 오래 울었다. 지난 11월30일 기자와 마주 앉은 박은경(35·가명)씨는 “그동안 쌓인 게 많았나 보죠”라고 담담히 말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이름도 갖게 됐다. 성매매 업소에서 일하는 14년 동안, 그는 한 번도 본명으로 불린 적이 없었다. 소라, 지선 따위가 그의 가명이었다.

성매매 여성 자활 도우며 새 삶 찾아

그는 이제 가정이 있다. 딸도 둘 있다. 남편은 그의 과거를 알지만 문제 삼지 않는다. 물론 결혼 뒤에도 위기는 있었다. 박씨는 새 살림에 뭐라도 보태야 할 것 같았다. 노래방 도우미 자리를 알아보려 했다. 남편이 말렸다. 그는 “죽기보다 싫었다면서 왜 또 하려고 하냐. 그냥 쉬어라”고 했다. 성매매 집결지를 나오고 처음 잡은 직장은 식당이었다. 13일 만에 잘렸다. 사회생활에 도무지 서툴렀다. 계산도 서툴렀다. 사람들이 알아볼까봐 두려웠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스스로에 대해 자괴감이 들었다. 박씨는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했다. 오래 머물던 성매매의 늪에서 마음까지 헤어나오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성매매 여성 자활지원단체의 도움이 컸다. 2005년 7월12일, 그는 지금도 이날을 기억하고 있다. 그가 자활단체를 통해 처음 일거리를 잡은 날이었다. 그는 “다시 태어난 날”이라고 했다. 그는 지금 인천 지역 성매매 여성 지원단체인 ‘인권희망센터 강강술래’에서 일하고 있다. 성매매 여성들을 상담해주고, 자활을 돕고 있다. 그는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이버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고 있다. “본의 아니게 성매매를 하게 됐거나 성매매에서 벗어나려는 여성들에게 롤모델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박씨는 오랜 굴곡에서 마침내 벗어난 운 좋은 경우다. 서울대 여성연구소가 지난해 말에 작성한 보고서 ‘성매매 실태조사’를 보면, 성매매 집결지와 성매매 알선 업소에 종사하는 여성은 전국에 14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됐다. 그만큼 많은 수의 ‘박은경’은 여전히 성매매 여성으로 남아 있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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