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소식
피해생존자들이 자신들의 성폭력 경험을 직접 노래로 만들고 공연한다는 기획을 세우면서, 한국성폭력상담소 내부에서도 여러 가지 우려들이 있었다. 많은 듣기 참여자들 앞에서 말하기 참여자들이 그저 자신의 사연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울 터인데, 과연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공연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말하기 참여자들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뿐만 아니라, 즉석에서 함께 연극을 할 것을 제안하고, 스스로 즉흥 춤도 췄다. 또 가해자를 만나러 가는 영상을 촬영하면서, 이런 걱정과 우려가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피해생존자들은 단지 '나약한 피해자'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직접 공연하는 '여성주의 문화창작자'로서, '끼있는 언니들'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성폭력을 당한 이후 틈틈이 기록했던 자신의 일기를 읽던 한 참여자는 끝내 낭독을 다 마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서른이 훌쩍 넘어야 비로소 여덟 살의 아이였던 자기 자신에게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화해의 손길을 내민 한 참여자는, 울지 않겠다고 원고를 미리 작성해왔지만 역시 마지막 대목에서 눈물을 흘렸다.
사실 나도 그녀들과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작년 제5회 말하기대회 '언중유희 - 이리 오너라 씹고 놀자'에 참여자로서 무대에 섰던 순간, 무슨 말을 해야할 지 가슴이 탁 막혀오던 기억이 있다.
나 또한 남들이 생각하듯이 무대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던 '전형적인 피해자'의 모습은 연출하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그 전날 밤 찬찬히 읽을 때는 그저 맨숭맨숭하기만 하던 내 원고가 무대에서 수많은 시선을 마주하고 읽어내리자니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무대에서 울다가 코를 훔치면서 "멋있게 눈물이 흐르지 않고, 콧물만 나네요" 하고 농담을 건네던 참여자, 목메인 소리로 펑펑 울다가 "울어도 할 건 다 합니다" 하고 너스레를 떨면서 이내 즉흥 춤을 보여주던 참여자. 그녀들의 눈물만큼이나 값진 그녀들의 농담과 유머 또한 그녀들의 '말하기'를 더욱 빛나게 했다.
성폭력 그후, 피해자인 내가 원하는 건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하다가 성폭력사건의 해결 과정에서 노동운동을 그만두게 된 한 참여자는, 시간이 지나서 과연 자신이 '피해자'이기 때문에 운동을 그만 두게 된 것일까?를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어쩌면 스스로 '피해자 정체성'에 머물면서 자신을 방어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하는 호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한 참여자는 성폭력을 당한 지 10년도 훨씬 더 지나 가해자를 만나러 가는 자신의 여정을 카메라에 담는다. "지금 와서 대체 원하는 게 뭐냐?"고 호통치는 가해자의 격한 목소리 앞에서 그녀는 "진정 내가 원하는 건 너의 사과는 아니야/ 아무리 받는다 해도 모든 것은 그대로일뿐/ 진정 내가 원하는 건 너의 죽음도 아니야/ 똑같이 되돌려줘도 모든 것은 그대로니까/ 귀찮아 이 슬픈 진행은 언제쯤 멈춰질 수 있을까?"라고 말하지만, 그녀의 대답은 미처 가해자에게 도달하지도 못하고 미끄러진다.
피해자들은 오랜 세월 동안 자신들의 자리에서 스스로 '피해'의 의미를 성찰하고, 자신의 '성폭력 경험'을 재해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가해자들에게, 혹은 세상에게 되묻고 싶다. 당신들은 과연 무엇을 성찰하고 있느냐?고. 혹시나 그녀들의 성찰에서 자신의 변명 거리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다음은 '성폭력 피해'로부터 살아남은 여자들에게 보내는 지지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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