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영·최미랑 기자 westzero@kyunghyang.com

ㆍ“예뻐야 해” “여자 박사 성격 나빠”…일상화된 편견과 멸시

23일 강남역 살인사건을 ‘묻지마 범죄’로 규정한 경찰에 항의하기 위해 SNS를 통해 모인 시민들이 서울 서초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23일 강남역 살인사건을 ‘묻지마 범죄’로 규정한 경찰에 항의하기 위해 SNS를 통해 모인 시민들이 서울 서초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어느 날 밤 여행가는 친구를 배웅하러 잠시 집 앞에 나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멀쩡한 정장 차림을 한 남성이 나를 불러세워 ‘저기요’라고 말을 걸었다. 그 남성은 대뜸 ‘5만원 줄 테니까 가슴 한 번만 만지게 해달라’고 했다. 순간적으로 얼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그가 나를 붙잡으려고 손을 올렸다. 무서워서 도망쳤다. 쫓아올까봐 집으로도 못 갔다.”

지난 20일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밖 추모 현장에서 열린 ‘여성혐오 증언대회’에서 20대 여성이 한 말이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살해된 피해자뿐만 아니라 이런 일은 여성 대부분이 겪고 있다. 이는 한국 사회에 뿌리 깊은 여성혐오와 여성폭력 문제”라고 말했다.

강남역 인근 화장실 살인사건이 ‘여성혐오 살인’으로 불리며 추모 열기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여성혐오’란 무엇인가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여성혐오(misogyny)’란 ‘여성 멸시’를 뜻한다. 단순히 여성 개인이 ‘싫다’는 감정 차원의 배제나 증오가 아니라 여성 일반에 대한 구조적 차별과 낙인을 의미한다. 일본의 저명한 페미니스트인 우에노 지즈코 도쿄대 명예교수는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란 책에서 “여성혐오는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고 밝혔다.

외모로 여성을 평가하고 성적 대상화하는 것이 가장 흔한 여성혐오다. 회사원 최모씨(29)는 신입 시절 남자 동기들에 의해 ‘얼평’(얼굴 평가)을 당했다. 최씨는 “남자들이 여자 직원들의 얼굴을 평가해 순위를 매겼다 들통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불편한 농담’은 일상이다. 최씨는 “회사 내에 ‘여자는 예뻐야 해’라는 분위기가 있다. 알바생이 들어오면 과장이 ‘예쁜 여자 오면 책상 정리 열심히 하고, 안 예쁜 애들은 더럽게 놔두더라’고 하는 게 아무리 농담이라지만 불편하다”고 했다.

이공계열 연구원 박모씨(29)는 “여자는 박사 하지 마라” “여자 박사는 성격이 나쁘다”는 이야기를 수시로 듣는다. 박씨는 “어느 박사가 성격이 안 좋을 수 있는데, 그 사람이 여성이면 꼭 ‘여자 박사’라고 부른다. 부정적인 상황을 표현할 때만 ‘여자’를 붙인다”고 했다.

성희롱·성폭력 등의 범죄는 이 같은 여성혐오적 인식이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된 것이다. 대학생 정모씨는 “항상 아빠가 힘없는 여성인 엄마와 나를 때릴까봐 너무 무서웠다. 얼마 전에도 아빠는 또 술을 마시고 엄마랑 나를 때렸다. 예전에는 ‘엄마가 약해서’ 우리가 맞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아빠는 ‘여자들이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였다”고 했다. ‘페미사이드’(여성살해)를 연구한 여성주의 활동가 황주영씨는 “개인적·윤리적 원인이 없는 범죄는 없지만, 어떤 범죄의 동기를 정당화해주고 발현하게끔 하는 사회구조가 있다. 여성만을 상대로 한 범죄의 경우는 여성혐오가 그것”이라고 말했다.

여성혐오가 심한 사회 속에 사는 여성들은 스스로를 검열한다. 직장인 김모씨(27)는 “택시를 타면 기사가 ‘남자친구 있느냐, 이성친구는 경계가 없지 않으냐’며 흘끔흘끔 쳐다보면서 캐묻는다. 출퇴근할 때 버스를 타면 조는 척하며 내 허벅지에 손을 갖다 대는 사람을 만난다. 이런 게 전부 내 옷차림 때문이고 내가 늦게 다닌 탓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우에노 교수는 “여성혐오는 남성에겐 ‘여성 멸시’, 여성에겐 ‘자기혐오’로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여성들이 강남역 살인사건에서 ‘여성혐오’를 발견한 것이 새로운 사회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황씨는 “‘성희롱’ ‘성폭력’처럼 여성학자나 여성단체가 싸우면서 개념화되고 널리 알려진 용어가 많다. ‘여성혐오’ 역시 사회적으로 범죄를 설명하는 용어로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홍미리 여성주의 활동가는 “혐오 범죄인지와는 별개로 여성들이 왜 모였는지에 관한 얘기가 지금 시점에서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