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뒤 "내숭인줄 알았다"…왜곡된 남성우월주의

 

 


2010-03-18 07:04 CBS사회부 조은정 · 김효은 · 최인수 기자

김길태 사건으로 성폭행(강간)을 비롯한 성폭력 범죄의 잔혹함이 새삼 조명 받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는 성폭력 범죄가 해마다 증가할 뿐 아니라 해외와 비교해서도 월등히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성폭행 범죄의 경우 왜곡된 성문화와 미미한 처벌로 인해 일상생활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어 특히 심각하다. CBS는 3회에 걸쳐 갈수록 만연해 지고 있는 성폭행 범죄의 실태와 원인, 대안을 모색해 본다. [편집자 주]

 

 

40대 대학 교수인 A씨는 대학원생 여제자를 강간했다. 학교측은 A씨가 상담소에서 가해자 교육을 받도록 조치했지만 그는 그다지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내숭인 줄 알았다"며 혐의 자체를 부인했다. 주변에는 "운이 없었다"며 떠벌리고 다녔다.

성범죄자를 자주 접하는 경찰이나 상담소측에 따르면 가해자들은 뚜렷한 죄의식을 찾기 어렵다고 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어진 상담가는 "애인이나 부인 등 지인을 성폭행하는 이른바 '데이트 강간범'들은 '재수가 없었다'고 오히려 억울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전했다.

상담소에서 1:1로 교육을 받았던 가해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싫은 척하는 줄 알았다", "내숭인 줄 알았다", "크게 반항하는 것 같지 않았다" 등이다.

남성들의 죄의식이 이렇게 무뎌 있는 것은 바로 왜곡된 남성 우월주의 때문이다.

남성들의 잠재의식에는 여성을 소유물이나 쟁취의 대상으로 여기는 심리가 강해 여성들의 거부와 반항을 '내숭'쯤으로 치부한다는 것이다.

남녀간 수직적인 권력관계에서도 원인을 찾기도 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어진 활동가는 "제자를 범하는 교수, 부하직원을 덮치는 상사처럼 상급자가 성폭행하는 경우도 많다"고 지적했다.

서울의 한 경찰서 형사는 "아는 사람들끼리 발생한 성범죄의 경우에 쉽게 혐의를 인정하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2009년 범죄백서에 따르면 지난 2008년 접수된 강간 사건 피해자 13,000건 중에 지인에 의한 '데이트 강간'은 2,400건으로 전체의 18%에 달했다.

그러면 생면부지의 타인을 강간하는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서울지방경찰청 소속의 한 간부는 한국의 발달된 인터넷 환경에서 답을 찾았다.

그는 "넘쳐나는 온라인상의 음란물이 미성숙한 네티즌의 성적충동을 자극하거나 모방 행동을 부추기고 있는 등 잠재적인 성폭행범죄자를 양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형사는 "성매매를 비롯한 발달된 유흥 문화가 강간범 증가와 연계돼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와 함께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패배감을 느낀 남성들이 약자인 여성을 성폭력으로 점령함으로써 자신의 열등감을 해소하기 때문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 침묵하는 여성들, 흉악범죄 양산의 또 다른 요인

애매한 잣대를 들이대는 법 조항도 성범죄를 양산하는데 한몫하고 있다.

애인에게 맞고 강간을 당한 20대 여성 B씨는 고민끝에 고소를 결심했지만 얼마 뒤 후회했다.

경찰 조사에서 B씨는 "애인관계 인데 강간이 맞느냐"며 추궁하는 경찰관들의 태도에 다시 한번 상처를 받아야 했다. "왜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않았냐"는 모욕적인 질문도 이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가해자는 강간죄와 상해죄로 불구속 입건됐지만 검찰에서 정작 강간은 무혐의로 결론났다. 폭행 또는 협박을 한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였다.

현행법에 따르면 강간죄는 '폭행 또는 협박을 수단으로 하여 부녀를 간음하는 죄'라고 명시돼 있다.

하지만 법률상 '폭행이나 협박'을 소극적으로 해석했을 경우에 문제가 된다. 실제로 여성이 공포감에 휩싸여 반항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폭행이나 협박이 없었다'는 이유로 강간죄를 피해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고 있다.

특히 '데이트 강간'의 경우에는 폭행이나 협박을 증명하기 어려워 아예 신고를 꺼리는 여성들이 많다. 경찰이나 검찰 조사 과정에서 받게 될 모욕과 상처 때문에 입을 다물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일상속의 '데이트 강간'이나 '근친 강간'이 진화해 흉악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연쇄살인범 유영철의 경우 부인에게 이혼 통보를 받은 것을 계기로 사회적 반감과 부인에 대한 복수심이 커져 본격적인 성폭행과 살인에 나섰다고 진술한 바 있다.

표창원 경찰대 범죄심리학 교수는 "강간 자체가 이미 타인의 인격이나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면서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지 통제 밖에 있는 타인에게도 범죄 심리가 확장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