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40705151007051


122명 국가 배상 소송

지난달 25일 오후 1시 서울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 건물 4층 기자회견장으로 10여명의 여성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표정은 굳어 있었다. 짧은 곱슬머리 파마를 해 젊게 보이는 이도 있었지만 대체로 나이가 좀 들어 보이는 여성들이었다. 평범한 동네 할머니 같은 모습이다. 이들에게는 말 못할 아픈 사연들이 숨어 있었다.

20140705151007842.jpg

기자회견장에 와 있던 취재진은 이들이 미군 기지촌 여성들임을 짐작했지만 사진을 찍지 않았다. 기자회견 사회를 맡은 신영숙 새움터 대표가 '기자회견장에 나온 것만으로도 큰 용기를 낸 분들이기 때문에 증언자들의 얼굴사진 촬영을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미군 기지촌 여성들의 국가를 상대로 한 피해보상 소송의 대표 변호를 맡은 김진 변호사(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여성위원회)가 마이크가 놓인 책상에 앉아 인사말을 시작했다.

"육이오가 64년째 되는 날이 오늘입니다. 국가는 오늘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전사자들에 대한 얘기만 합니다. 그러나 전쟁은 이 땅의 여성들에게도 아물 수 없는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전쟁 이후 기지촌을 조성하고 사실상 관리하면서 여성의 인권을 침해했습니다. 윤락행위 방지법과 유엔 인신매매 금지협약(우리나라는 1962년 발효)은 휴지 조각이었습니다. 성폭력과 구타, 감금, 강제 낙태, 성병 강제검진 및 치료, 성매매업소 주인과 경찰 공무원의 유착 비리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운 국가 범죄가 있었습니다. 원고 122명은 국가가 일인당 1천만원씩 보상하라고 오늘 서울중앙지방법원에 고소장을 제출합니다."

이어 한 여성이 방청석에 앉아 있다 일어났다. 그는 기자들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소송에 참여한 기지촌 여성이 첫 공개 증언을 하는 순간이었다.

성폭력·강제낙태 등 국가범죄
1인당 1천만원씩 보상을 요구
태반이 60~80대 독거노인인 그들
가만있어선 안 된다는 공감대
김정자씨 증언록 발간으로 확산

이번 소송에 참여하며 증언 나선
조명자·최자영·박순이씨
기지촌 여성 대부분은 아직
언론과의 접촉을 피하는 가운데
세 사람을 어렵게 만났다


국가폭력 물증 나오며 소송 준비에 속도

"어릴 때 제 꿈은 국회의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신매매되어 기지촌으로 팔려온 뒤 꿈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정부는 우리에게 '미군에게 서비스를 잘하라'는 교육만 시켰습니다. 위안부 여성들은 가슴을 치면서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달러 버는 기계였습니다. 우리는 윤락행위 방지법은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연세가 많은 위안부들은 지금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면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국가가 대답해야 합니다."

박수가 터져나왔지만 곧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여성은 자리로 돌아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곳곳에서 콧물을 들이켜는 소리와 흐느낌 소리가 뒤엉켜 새어나왔다. 여성들은 "국가는 한국 내 기지촌 미군 위안부 제도의 역사적 사실과 피해를 명확히 밝히고 사죄하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읽은 뒤 기자회견을 마쳤다.

기지촌 여성들의 소송은 2011년부터 준비됐다. 1970~80년대 한창 활동했던 기지촌 여성 대부분이 적게는 60대, 많게는 80대 이상에 접어들고 독거노인으로 쓸쓸하게 살다 하나둘 세상을 뜨자 이대로 가만있어선 안 된다는 공감대가 과거 기지촌 여성들 사이에 퍼졌다.

이번에 <한겨레>와 인터뷰한 기지촌 여성 김정자씨가 증언록을 만들면서 소송 준비가 본격화했다. 지난해 출간된 김씨의 증언록 <미군 위안부 기지촌의 숨겨진 진실>은 그가 30여년간 일해왔던 기지촌 곳곳을 직접 방문해 그곳에서 당한 각종 폭력의 경험을 사진과 함께 고발한 책이다. 2005년 기지촌 여성 김연자씨가 펴낸 수필집에 이은 생생한 증언이었다.

김씨는 기지촌 여성 인권 단체 활동가들과 함께 그동안 감추어져 왔던 국가 기록들을 발굴하기도 했다. 한국 정부가 그동안 미군 위안부 시설들을 어떻게 계획하고 직간접적으로 관리했는지와 관련한 것들이다. 단순한 증언을 넘어 국가가 기지촌 여성에게 저지른 폭력의 책임을 입증할 직간접적인 물증들이 나오면서 소송 준비는 속도가 붙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변호사들이 소송을 돕고 기지촌여성인권연대, 한국여성단체연합, 새움터 등이 공동으로 소송을 준비했다.

김정자씨뿐 아니라 기지촌 여성 인권 단체와 관련을 맺던 다른 여성들도 증언에 나섰다. 대부분은 아직 언론과의 접촉을 피하지만 <한겨레>는 이번에 소송에 참여한 두명의 여성을 더 만날 수 있었다.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에 거주하는 조명자(75)씨가 그중 한명이다.

지난 2일 조명자씨는 지붕이 곧 무너질 것 같은 허름한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길가에 난 대문이 곧바로 부엌과 연결되고 부엌에 딸린 방은 겨우 13㎡(4평) 남짓 될까 한 비좁은 집이었다. 월세가 8만원인 이 집은 경제능력이 없는 조씨가 국가에서 주는 기초생활수급비 38만원과 노령연금으로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보금자리다.

"이 집을 곧 허물어야 한다고 주인이 나가라 그러는데 버티고 있어. 평택도 이제 땅값이 많이 올라 이 늙은이가 이사갈 집이 없어." 치아가 두개밖에 남지 않은 조씨가 힘겹게 말했다. 방에는 창문이 없어 찜통처럼 더웠다. 5년 전부터 척추협착증이 왔고 후유증으로 오른쪽 다리가 마비돼 지팡이 없이는 걷지 못한다. 더워도 이 집에서 그냥 누워 있는 게 조씨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마흔두살 때까지 몸을 팔았지. 동두천 턱걸이(동두천시 광암동 일대)랑 보산리 등등 안 가본 곳이 없어. 중3 때 보성여중을 중퇴했어. 너무 먹고살기 힘들고 아버지가 자꾸 때려서 집을 나왔어. 포주한테 팔려왔지. (포주가) 밥 먹여주고 재워주긴 했는데 빚이 달려 있더라고."

조씨는 스스로 기지촌에 머물러 있었던 편이지만 그래도 국가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서 했든 어쨌든 미군 때문에 달러를 벌었잖아. 우리가 없었다면 어떻게 이 나라가 그때 달러를 벌었겠어. 우리가 미군에게 성병 옮길까봐 강제로 성병 검진하고 (국가가) 온갖 나쁜 짓을 다 했어. 우리는 이제 늙어서 어디 갈 데도 없어. 할머니들이 항문이 다 헐어서 똥을 질질 싸고 있어. 국가가 이렇게 우리를 내팽개쳐도 되나?"

 "왜 그렇게 미군들한테 꼼짝 못했죠?"

기지촌 여성들은 태반이 독거노인으로 늙어간다. 자식도 없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한 경우도 드물다. 늙은 몸뚱어리를 편히 누일 수 있는 작은 집이라도 국가가 마련해줬으면 한다.

안정리에 사는 기지촌 여성 최자영(가명·63)씨도 조씨와 같은 생각이다. 그도 독거노인으로 늙어간다. 다만 아직 활동이 가능해 밤에 클럽 웨이트리스로 일하며 푼돈을 번다.

"열여덟에 집을 나와 서울역 근처 직업소개소를 찾아갔어. 미군 클럽에서 일해보라고 하더라고. 미군하고 자야 된다고 말은 해주던데 그 나이에 잔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알았겠어? 잠은 누구나 자는 거니까 '일하겠다'고 했지. 직업소개소 아저씨가 '기지촌 온 것 후회하지 말라'는 각서도 쓰게 했어. 안정리로 왔는데 잔다는 게 내가 알던 거랑 다른 거야. 그만두겠다고 하니까 포주집에서 엄청 때렸어. 경찰에 신고할 생각을 못했어. 모두 한패라고 생각했거든. 그때 국가가 나서서 우리를 구해줬더라면 내가 이렇게 되진 않지 않았을까. 오로지 미군한테 성병 안 옮기게 그것만 신경 썼다니깐. 이래도 되는 거야?"

박순이(가명·60)씨는 오랜 고심 끝에 지난 1일 기자와 만났다. 박씨도 인신매매 피해자였다. "(1970년) 열여섯살에 집을 나왔어요. 서울역 인근 직업소개소를 갔어요. 일자리를 준다 그래서 따라갔는데 파주 용주골 허름한 집으로 데려가더라고요. 내가 쓸 방이라고 하면서 들어가라는데, 헌 침대랑 탁자 하나 있더군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튿날 어떤 미군이 제 침대에 들어와 앉는 거예요. 난 방구석에 앉아 울기만 했어요. 무서웠어요. 집에 가고 싶다고 하니까 아줌마(포주)가 돈 내고 가라는 거예요. 소개비랑 침대비요."

어린 박씨를 보호하기 위한 국가는 없었다. 인신매매로 팔려온 미성년자를 구출하러 오는 이도, 구출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이도 없었다. 기지촌을 벗어나려 할 때마다 돌아오는 건 매타작뿐이었다.

"저는 솔직히 이 나라가 미워요. 왜 미군들에게 그렇게 꼼짝을 못한 걸까요. 신경질 나요. 나이 어린 애들을 미군에 몸 대어 주게 만들었던 대통령(박정희)을 저는 우상처럼 생각하면서 자랐다니까요."

박씨는 지금이라도 국가가 사과해주길 바란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 소식이 텔레비전에 계속 나오면 유심히 지켜봤어요. '저분들도 원해서 위안부가 된 게 아니고, 나도 원해서 위안부가 된 게 아닌데 왜 나는 피해 여성이 아닌 거지?' 이런 생각을 계속했어요." 박씨는 40대가 되어서야 기지촌을 나왔다. "내 열여섯 꽃다운 나이 어떡하면 좋아요." 그는 인터뷰 내내 휴지를 꺼내 들어 끊이지 않고 쏟아지는 눈물을 닦았다.

허재현 기자cataluni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