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매매 여성 ‘脫業 활동가’ 열아홉살 경민이


화려한 네온사인이 켜진 대전의 한 유흥가 밤거리. 가정폭력과 부모의 이혼 등으로 집을 나온 청소년들은 밤새 유흥업소를 돌며 술접대와 성매매로 내몰린다. 얼마 전까지 고등학생이었던 경민이도 학교 수업이 끝나면 교복을 갈아입고 ‘삼촌’이 운전하는 차량을 탄 채 먼동이 틀 때까지 이곳을 전전했다. 동아일보DB

9월 하순 대전의 여성인권단체 활동가와 회원들로 구성된 ‘민들레순례단’이 과거 미군 기지촌이 있던 전북 군산시 ‘국제문화마을’의 성매매 업소 밀집지역을 둘러보고 있다. 느티나무 제공

 “그냥 신나게 탬버린 치고 노래 번호만 검색해 주면 돼. 한 시간에 3만 원은 줘.”

 2013년 가을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한 살 위 언니가 웃으며 말했다. ‘놀면서 돈까지 많이 벌 수 있다니….’ 열여섯 경민(가명)은 호기심이 일었다. 그 언니를 따라 노래방에 갔다. “언니들 보면서 잘 따라 해.” 노래방에서 만난 ‘삼촌’이라는 사람이 친절히 말했다. 경민이는 처음 보는 20대 중반의 언니와 함께 어느 방에 들어갔다.

 ‘손님들이 만지려고 하면 안 돼요∼라고 해야지. 그리고 술만 따라야지.’

 순진한 착각이었다. 같이 들어간 언니는 나이 많은 아저씨들이 보는 앞에서 자연스럽게 윗옷을 벗었다. 경민의 입에서 “헉” 소리가 나왔다. 언니는 “뭐 해, 애기야”라며 손짓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경민을 아래위로 훑었다. 눈앞이 하얘졌다. 눈을 질끈 감고, 언니를 따라 옷을 벗었다.

 방을 나와서야 알았다. 그곳이 ‘끝까지 가는 방’이었다는 사실을. 삼촌이 ‘설마 처음 일하는 애가 얼마나 버티겠느냐’는 생각에 시험 삼아 수위 높은 방을 골랐다는 사실은 한참 뒤에 알았다. 그날 바로 ‘더는 못 한다’고 했어야 했는데…. 그 말이 어려웠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가정폭력과 외로움 때문에…

 열아홉 경민은 대전의 여성인권상담소 느티나무에서 활동하며 성매매 여성들의 탈업(脫業)을 돕는 현장 활동가를 꿈꾼다. 평일 낮에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일을 하지 않을 때에는 성매매를 하는 미성년자 아이들에게 멘토링을 하는 등 ‘반(反)성매매’ 활동에 열심이다.

 기자는 얼마 전 느티나무 사무실에서 경민을 만났다. 건강한 피부와 큰 목소리, 부드러운 표정을 지닌 소녀였다. 느티나무의 소장은 경민이 걱정되는지 “인터뷰 동안 같이 있을까”라고 말했다. 경민은 “가세요. 나중에 기사로 보세요”라며 웃었다. 자신의 과거를 솔직하게 언론에 밝히는 이유는 딱 한 가지. 한때 자신처럼 성매매 굴레에 빠져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여성들을 구해 내고 싶어서다.

 어린 경민의 기억 속에 부모는 자주 다퉜다. 아버지는 3, 4개월에 한 번씩 집에 들어올 때마다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했다. 결국 초등학교 6학년 때 부모가 이혼했다. 경민은 아버지의 손에 넘겨졌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했던 것처럼 경민에게 화풀이를 했다. 조금만 집에 늦게 들어와도 “학교 끝났으면 바로 집에 와야지”라며 이유 없이 때렸다. 결국 1년을 참다가 가출했다.

 한 달간 친구 집을 전전하다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매몰차게 경민을 내쫓았다. 학교도 그만두고 대전에 있는 할머니 집으로, 다시 어머니 집으로 떠돌았다. 하지만 어머니 집엔 ‘새아빠’가 있었다. 새 가족을 꾸린 어머니는 경민이 없이도 잘 지내는 것 같았다.

 낯선 동네에 마음 둘 곳이라곤 세 살 많은 남자친구밖에 없었다. 그는 어느 날 “내가 좋아한다면 어디까지 해 줄 수 있느냐”라며 “내가 사고 싶은 게 있는데…”라고 말했다. 남자친구가 온라인 채팅사이트로 조건만남을 주선했다. 경민은 성매매를 하고 받은 돈을 10원도 남기지 않고 몽땅 남자친구에게 건넸다. 그게 성매매의 시작이었다. 경민은 “지금 생각해 보니 완전히 나를 이용해 먹은 것”이라고 했다.

 그때 경민을 걱정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공장에서 야간 일을 하던 어머니는 자기 한 몸 챙기기도 힘들었다. 일주일에 6차례 오후 8시에 삼촌이 모는 차를 타고 보도방(유흥업소에 여성 도우미를 공급하는 무허가 업체)으로 출근해 노래방과 주점을 옮겨 다녔다. 새벽 5시 일이 끝나면 삼촌 차를 타고 퇴근했다. 집에서 화장을 지우고 교복으로 갈아입으면 밖에서 기다리던 삼촌이 다시 학교에 데려다줬다. 학교에선 하루 종일 잠만 잤다.

 경민은 “왜 너만 못 하느냐”란 말이 가장 듣기 싫었다. 경민은 ‘진상’ 손님을 만나도 “싫어요”라고 꺼리는 대신 “손님이 너무 진상인데 시간 조금만 빼 주세요”라고 주인에게 부탁했다. 그래서 보도를 찾는 노래방과 주점에선 경민을 유독 예뻐했다. 책임감도 강했다. “오늘 손님 많을 텐데 내가 없으면 언니들이 힘들겠지”, “이 방을 박차고 나가면 언니들이 돈을 못 벌겠지”, “내가 가장 어리니까 더 참아야지” 하면서 버텼다.

 그런 경민도 견디기 힘들 때가 있었다. 손님들이 몰래 사진을 찍을 때가 그랬다. ‘찰칵’ 소리가 나면 화가 나야 하는데 경민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부터 숨겼다. 저항을 해도 도리어 “넌 술집 여자잖아. 내가 돈 줬잖아”라는 말이 되돌아왔다.

 초저녁에 가게 문을 열자마자 경민을 찾는 손님도 있었다. 그는 경민의 몸에 손도 대지 않고, 술도 먹이지 않았다. 다만 노래방 화면 앞에 서서 춤추길 강요했다. 한 곡당 만 원, 옷가지를 하나 벗으면 5만 원짜리 지폐를 유리컵에 꽂았다.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드는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소용없는 후회였다.

 아버지 또래 성매매 남성들은 경민의 나이를 꼭 물었다. 거짓말로 “스물세 살”이라고 둘러대면 하나같이 경민의 몸을 만져 대며 “우리 딸이 열일곱인데”, “우리 아들이 스무 살인데”라며 자기 자식 이야기를 꺼냈다. 속으로 “어쩌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냥 “네네” 하고 이야기가 빨리 끝나기만 바랄 뿐이었다.



“쉬고 싶다” 한마디에 돌아온 폭언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2차를 나가서 성관계를 맺으면 머릿속으로 딴생각을 했다. ‘제발 빨리 끝나라’고 기도했다. 너무 힘든 날은 모텔 현관문을 계속 바라봤다. 경찰이 저 문을 따고 들어와 이 생활을 끝내 주길 바랐다. 단 한 번도 그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일한 곳은 경찰 단속을 미리 알았어요. 삼촌의 누나가 여경이라고 했는데 꼭 단속할 날을 알려줬어요.”

 몸은 하루가 다르게 망가졌다. 사무실 언니들과 콘돔 4000개짜리 한 박스를 사면 6개월도 가지 않았다. 질염은 감기처럼 사소한 질병이었다. 아래에서 까만 분비물이 나오거나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는 돼야 겨우 “아프다”는 얘기를 꺼낼 수 있었다.

 오래 일한 언니들은 호르몬이 망가져 4, 5개월에 한 번씩 생리를 했다. 경민이 한 달에 한 번씩 생리를 하면 삼촌은 “넌 왜 이렇게 자주 하느냐”라고 타박했다. 물티슈로 피를 막고 2차를 나갔다. 찬물로 아래를 씻어 내면 일시적으로 피가 멈췄다. 지난해 8, 9월에는 몸이 덜덜 떨려 패딩을 꺼내 입어야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이힐을 신다 보니 자주 넘어졌다. 발목은 늘 파랗게 멍들어 있었다.

 지난해 12월 말 유흥업소가 붐볐다. 하룻밤에 네다섯 곳을 돌았다. 10월에 시작한 생리가 끝나질 않았다. “꼭 유산한 것 같았어요.” 하혈이 계속되자 응급실에 실려 갔다. 삼촌한테 전화를 걸어 “몸이 너무 안 좋은데 일주일만 쉬었다 나오면 안 될까요” 간청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라. 이래서 어린 ×은 안 된다”였다.

 일을 시키고 따르는 관계였지만 그래도 어느 땐 ‘가족’ 같다고 생각했던 삼촌이었다. 여름이면 짧게나마 언니들과 휴가도 같이 갔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생각했다. ‘이래서 남은 남이구나. 더 있으면 안 되겠다.’ 경민은 휴대전화를 끄고 그날로 일을 그만뒀다.

 연락을 안 받자 삼촌은 경민의 집까지 찾아왔다. 밖에서 문을 계속 두드렸다. 결국 휴대전화 번호를 바꾸고 집을 옮겼다. 그래도 가슴 철렁한 일은 자꾸 일어났다. 길을 걷는데 누군가 뒤에서 “보라야” 하고 불렀다. 술집에서 쓰던 가명이었다. 뒤돌아보면 안 되는데 순간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예전에 봤던 성매매 남성이었다. 경민은 모르는 사람처럼 앞으로 내달렸다.



800만 원보다 소중한 80만 원

 경민은 8월부터 집 대신 그룹홈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티움에서 만난 현장 활동가가 소개해 준 곳이다. 그곳에서 경민은 성매매를 했던 ‘경험 활동가’들도 만났다. 그들은 “괜찮아, 더 잘할 수 있어.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면 돼”라고 용기를 줬다. 멋있었다.

 이곳에서 일하며 돈의 소중함도 배웠다. 성매매 업소에선 한 달에 최고 800만 원씩 벌었다. 현금으로 돈을 받으니 씀씀이도 커졌다.

 지금 경민은 80만 원을 받는 월급 날짜를 기다리며 ‘작은 것’ 하나 사는 즐거움을 맛본다. 가끔 생활비가 부족할 때 “딱 하루만 나가서 돈을 벌까” 하는 유혹에 빠질 때가 있다. 그래도 이제는 엄마 생각에 꾹 참는다. 그는 “고등학생 딸이 밖에서 이런 일(성매매)을 한다는 사실을 엄마도 인정하기 싫었을 것”이라며 “엄마가 보내 준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라’는 문자메시지도 잊기 어려웠다”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자신을 응원해 주는 수많은 선배 활동가들과 선생님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내가 그곳으로 돌아간다면 힘들게 일하는 그분들이 얼마나 회의감이 들겠어요.” 경민은 이제 몇 년씩 성매매의 늪에 빠져 탈출할 생각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구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과거의 저처럼 이 일 아니면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자괴감에 빠진 사람들이에요. 똑같이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사람에게 마음속 진실된 이야기로 울림과 감동을 주고 싶어요.”

박훈상 tigermask@donga.com·홍정수 기자